지난해 6월, 학술진흥재단과 한국
과학재단, 국제
과학기술협력재단 등 3개 단체가 통합돼
국내 학술 지원을 전반적으로 떠맡는 한국연구재단(이하 연구재단·사진)이 출범했다. ‘통합된
기구로 학술 지원의 효율을 높이겠다’는 것이 주요 취지였다. 그러나 1년이 흐른 지금, 학자들 사이에선 연구재단의 인문·사회 분야 사업과 학술정책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과학중심 운영…심사과정 문제”
별도의 지원 체계·장기계획 필요
최근 진보적 성격의 학술단체 연합체인 학술단체협의회가 <교수신문>과 함께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 394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연구재단 중심의 학술정책이 연구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재단 출범 뒤 인문·사회 분야 학술정책의 변화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68.8%가 ‘과거보다 지원이 취약해졌다’고 답했다. ‘자연과학 중심으로 운영돼 불편해졌다’(66.8%)가 그 뒤를 이었다. 게다가 연구과제 심사과정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10%에도 못 미치는 한편, 낮은 선정률, 정형화된 심사기준, 정치적·이념적 기준 적용, 인맥과 로비의 작용과 같은 부정적인 평가는 50~70% 등으로 나타나는 등 심사과정에 대한 불신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조사와 학자들의 의견을 모아볼 때, 현재 연구재단에 대한 문제 제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기존 인문·사회 분야 지원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던 학술진흥재단(학진)의 운영방식이 현재 연구재단으로 통합되며 크게 바뀌어, 학문의 자발성·자율성이 위축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설문조사에서 연구자들은 인문·사회 학문 분야의 실태에 대해 ‘후속세대 고용 불안정’(87.6%)과 함께 ‘이데올로기 통제 시도 증가’(59.7%)를 가장 많이 꼽았다. 지난해 중앙대 독일연구소와 상지대·한신대·성공회대가 공동 설립한 민주사회정책연구원이 인문한국(HK) 지원사업 전문가 심사에서 1위를 하고도 탈락한 일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올해에는 인문·사회본부장의 전횡에 반발한 단장들이 대거 자진사퇴하는 일(<한겨레> 7월12일치 2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해당 본부장은 내부감사에서 정당한 공모 절차 없이 동료와 제자들을 연구과제 책임자로 선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진사퇴한 단장 가운데 한 사람인 임영호 부산대 교수는 이런 현상에 대해 “기존 학진은 교육부에서 사업을 위탁받아 자율적으로 업무를 하던 기구였지만, 지금의 연구재단은 교육과학기술부의 담당자가 직접 통제하고 관리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자율형’ 기구가 ‘관 주도형’ 기구로 바뀌다보니, 이전과 다르게 조직운영에 연구자들의 의견이 반영될 기회가 거의 없다는 주장이다. 임 교수는 “학술단장을 맡았었지만, 본부장과 지원단이 결정하는 일에 전혀 개입할 수 없었다”며 “독일연구소·민주사회정책연구원과 같은 일이 벌어져도 해당 단장이 그 내막을 잘 모를 수 있는 폐쇄적인 구조”라고 말했다.
이는 인문·사회 분야에 적합한 지원체계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문제와 연결된다. 학진 운영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과학재단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 분야의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인문·사회 분야에 적합한 지원체계를 따로 마련하지 못하고 과학기술 분야의 지원체계를 따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대형 국책과제가 많은 과학기술 분야는 정부가 주도하는 ‘톱다운’(top-down) 방식이 많은데, 인문·사회 분야가 자율적·자발적인 관심으로 시작해 학문을 깊게 파고들어가는 고유의 ‘보텀업’(bottom-up) 방식을 고수하지 못하고 그 흐름에 휩쓸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설문조사에서 장기 대형과제, 공동연구 과제 등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나타난 것은 이런 현상의 결과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인문·사회 분야 학술정책이 미흡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라는 점이 더 큰 문제다. 권용혁 울산대 교수는 2009년 연구재단에 제출한 정책보고서에서 “학문 지원정책에서 이공 분야의 마스터플랜만 존재할 뿐 인문·사회 분야에는 아예 없고, 법과 제도도 ‘학술조성법’ 하나에만
기대고 있어 불균형 현상이 심각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등재지에 실은 논문의 수를 지원사업의 주요 선정기준으로 삼는 ‘물량주의’나 비정규직 교수들의 열악한 처우 문제,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는 연구자들이 지원사업에 매달릴 수밖에 없어 깊이 있는 학문이 나오기 힘든 현상 등은 학진 때부터 꾸준히 비판이 제기된 고질적 문제점이기도 하다.
최종덕 상지대 교수는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판치는 미국에서도 인문학에 대해서는 ‘국립인문재단’을 만들어 전방위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며 “인문·사회 분야 지원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 수립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는 “인문·사회 분야는 과학기술 분야와 다른 학문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차별화된 체계가 필요하다”며 별도의 기구 수립 또는 분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또 지원사업의 방향에 대해서는 “연구지원을 개인과제 중심으로 전환하고 연구기간은 장기화해 안정된 연구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