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는 정권의 전리품이 아니다

30일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가 ‘고등학교 한국사 집필기준’(이하 집필기준)을 확정․발표했다. 이번 집필기준에는 지난 8월 9일 발표한 중학교 역사교육과정과 11월 8일 발표한 중학교 역사 집필기준에 대해 역사학계가 시종 시정을 촉구한 핵심 사안이 여전히 반영되지 않았다. 교과부는 “자유민주주의,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 독재 관련 표현 등은 중학교 집필기준과 동일한 원칙에 따라 서술하였다”고 밝혔다. 수구‧냉전세력인 뉴라이트의 주장을 받아들인 중학교 역사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을 고등학교 한국사에도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1.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반공주의

집필기준에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바탕으로 발전해 왔으며”(17쪽)라고 명시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뉴라이트 계열인 한국현대사학회의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명시할 것”이라는 건의(2011.7.4. 「2011 역사교육과정 개정안에 대한 ‘한국현대사학회’의 건의」,이하 건의서)를 교과부가 전격적으로 수용하여 8월 9일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사회과 교육과정’을 고시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이에 대해 그 동안 역사학계는, 교과부가 근거로 주장하는 헌법 전문에 쓰여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아니라, 독일 기본법에서 말하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 the principles of freedom and democracy)’를 의미한다고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 게다가 1)지금까지 사용해온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가 제시되어 있지 않으며 2)용어를 바꾸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도 무시하였고 3)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에 대한 개념정의조차 하지 않았으며 4)사회, 도덕(윤리), 정치, 경제 등 과목에서는 민주주의라고 쓰는 반면 유독 역사 과목에서만 자유민주주의를 사용하는 것은 과목간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추가로 지적하고자 한다.

하나는 자유민주주의가 헌법적 이념이라는 교과부의 해명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용어가 헌법 전문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72년 12월 27일에 7차 개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이다. 그러나 헌정을 중단시키고 국회를 해산한 가운데에 계엄령상태에서 제정된 유신헌법은 주권을 국민으로부터 빼앗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기관으로 하여금 대신 행사하도록 함으로써 국민주권원리를 부정하였으며,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의 1/3을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였다. 또 대법원장에게 부여된 법관에 대한 임명권을 대통령이 빼앗아 장악함으로써 사법권 독립을 부정하였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정의를 내린 곳은 헌법재판소(헌재)였다. 헌재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 함은 헌법이 수호해야 할 최고 가치로서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의 배제,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자유와 평등의 기본원칙에 의한 법치주의적 통치 질서를 의미하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 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이라 하였다(헌재 1990.4.2. 선고 89헌가113 결정).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권력분립과 의회제도의 원칙을 부정하고 ‘권력의 인격화’를 위해 제정된 유신헌법이 헌재가 말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양립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유신헌법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자유민주주의로 보는 것은 오독(誤讀)이다.

다른 하나는 수구‧냉전세력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한 형태가 아니라 반공주의라는 사실이다. 한국현대사학회는 건의서에서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의 문제점만 비판하고 반공정책의 시대적 필요성 및 긍정적 기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이 분명하게 인식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민주주의를 반공 차원에서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독재정권이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의 도구로 이용한 것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며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한 이승만과 박정희의 반공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점을 인식시키도록 하자는 주장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강요하는 속셈이 반공주의를 부각시키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2. 평화통일에 배치되는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론’

집필기준의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은 사실에 유의한다.”(16쪽)는 내용 역시 한국현대사학회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이다. 한국현대사학회는 건의서에서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관련하여, 대한민국이 유엔의 지원과 국제적 승인 하에 성립‧출범하였음도 분명하게 배울 수 있도록 강조”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먼저,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 아니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의 결의는 한반도 전체에 대한 대한민국의 합법성을 승인한 것이 아니라, 선거가 실시된 지역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였다. 유엔의 결정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 즉 38선 이남의 선거를 결정한 것이고, 승인도 그 지역에 한정된 것이었다. 따라서 유일한 합법정부란 38선 이남에서 유일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와 같은 유엔의 결의는 어떤 이념이나 정파의 이해를 떠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다. 국제기구에서 결의한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않고, 그것도 틀린 사실임을 역사학계에서 지적하였는데도 교과서에 그대로 서술하겠다는 것은 이미 교과서로서, 특히 역사교과서로서의 기본마저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 사실관계에도 맞지 않는다. 1991년 9월 17일 북한이 유엔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은 1948년 유엔이 한국을 승인할 당시, ‘코리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 하지 않고, ‘코리아에서 유엔 임시위원회의 선거감시가 가능했던 지역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한정했기 때문이다. 1950년 6.25 남침에 대한 반격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했을 때, 북한지역에 대해 대한민국이 행정권을 갖지 못하고 유엔군이 최고행정권을 가졌던 것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게다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이념에도 배치되는 주장이다.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면 같이 한반도에 있는 북한은 ‘불법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 민족사의 차원에서 남북한 역사를 병렬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버리고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한국현대사를 써야 하며, 북한의 역사는 민족사의 동등한 범주가 아니며 비정통적이고 불법적 국가이므로 배제하자는 주장인 것이다. 이는 북한을 적대시하고 흡수 통일하는 길만이 북한 해방의 유일한 해법이라는 냉전적 사고이다. 그러나 남북한은 유엔 동시 가입국이다. 유엔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합법정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헌법은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동족간의 대립 갈등을 조장하는 냉전적인 역사의식이 아니라 공존과 상생, 호혜와 평등에 입각하여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역사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친일파를 복권시키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다. 현대사학회는 건의서에서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관련하여,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 측면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유엔의 지원을 받아 건국하였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배울 수 있도록 강조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유엔의 권위를 빌어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을 역사적 정통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1945년 ‘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상쇄시키는 한편, 해방공간에서 소외된 친일파를 건국세력으로 부활시키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3. 이승만, 박정희 등 독재정권의 합리화

집필기준의 “장기집권 등에 따른 독재화”(17쪽)라는 표현도 사실이나 인과관계가 맞지 않는다.

첫째, 이승만의 독재, 4.19혁명을 짓밟은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 등은 당초 그 등장부터 민주적 정당성이 없었다. 독재를 장기집권의 결과물로 서술하려는 까닭은, 이승만·박정희 등 독재자들의 등장이 정당했고 장기집권 이전에는 독재를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면죄부를 주려는 의도가 작용한 때문이다.

둘째, 장기집권은 독재의 원인이 아니라 독재정권이 취하는 수많은 민주헌정 파괴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일으킨 발췌개헌‧사사오입개헌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개헌 등은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 헌정 질서를 파괴한 것이다. 즉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가 아니라 ‘장기집권을 위해 민주헌정질서를 파괴한 것’이다.

셋째,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화’라고 한다면, 7년 단임을 한 전두환은 독재자가 아닌 셈이 된다.

집필기준은 "4‧19 혁명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발전과정을 5·16 군사정변 등 정치변동과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등 민주화 운동, 헌법상의 체제 변화와 그 특징 등 중요한 흐름을 중심으로 설명한다”(17쪽) 라고 하여,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기술하도록 했다. 또 "정부 수립 전후 단독 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으로 나타난 제주4·3 사건 및 친일파 청산 노력 등을 기술하도록 유의한다.”(16쪽)라고 하여, 제주4·3 사건, 친일파 청산 노력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 역사적 사건들이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빠졌다가 역사학계의 거센 비판과 반발을 겪은 뒤에야 이런 지침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재정권을 합리화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상호모순이다. 따라서 이번 집필기준에서 민주화운동 등의 역사를 서술하도록 한 것이 역사학계의 의견을 수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를 누락시킴으로써 발생한 사회정치적 파장을 무마하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2월 취임사에서 지난 10년 ‘이념의 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실용의 시대’로 나가겠다고 선언하였다. 건국 60년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기반으로 선진화를 이루어야 하며, 이제는 ‘투쟁의 시대’를 끝내고 ‘동반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말하는 이념의 시대=투쟁의 시대 10년이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집권기를 가리킨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립한 공로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파악하는 이 대통령의 역사인식은 수구·냉전세력인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이 대통령은 건국 60년의 정신적 자산을 계승하여 선진화를 이룩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는 건국(이승만 대통령)→산업화(박정희 대통령)→민주화(노태우 대통령)→선진화(이명박 대통령)의 역사정식을 세우겠다는 선언이다. 취임 이후 지난 4년간의 흐름을 되짚어 보면, 이 대통령이 말하는 선진화 시대의 동반자란 친일·독재세력이었음이 드러난다. 2008년 5월 29일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당시 국회부의장)이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to the core) 친미-친일이니, 그의 시각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는 미 외교전문으로 미루어 볼 때, 친일·독재세력과의 동반과 상생을 지향하는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지침이야말로 이명박 정부의 ‘맨얼굴’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교과서는 정권의 전리품이 아니다. 교과서는 한 시대와 한 사회가 달성한 상식적인 가치와 규범을 반영한 것이자 지(知)의 축적물이다. 그런데 현 정권은 이 원리를 무시하고 역사를 제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죄를 저질렀다. 그것도 무덤 속에서 있어야 낡은 이념으로. 더 큰 죄는 교과서를 정권의 전리품으로 만듦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낸 민주적 질서를 파괴한 것이다. 만일 지금과 같은 방식이 용인된다면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교과서가 바뀌어야 하는 최악의 선례를 만들어 놓게 되는 것이다. 이 엄청난 죄를 현 정권은 알기나 하는가. 이 점에서 이주호 교과부장관의 죄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할 지경이다. 또한 현행 집필기준을 즉각 철회하고 역사학계의 공통된 의견을 반영하는 상식적인 절차가 복원되어야 할 것이며, 교육을 퇴행적으로 만든 사태에 대해 대통령이 사과해야 할 것이다.

 

 2011년 12월 30일
친일·독재미화와 교과서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