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 중심의 생산패러다임 넘어서기
2008년 이명박 정권은, ‘촛불’의 행진을 막았던 ‘명박산성’과 ‘물대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2년 현재 이명박 정권은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후광 뒤에 숨어 운신하는 처지가 되었다.
5년이 흐른 현재의 시점에도 ‘부자를 꿈꾸는 우리의 욕망’은 그들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휘몰아쳤던 신자유주의는 ‘고삐 풀린 자본의 욕망’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들이 내세웠던 공동체적 가치와 국가의 공적 기능을 지키지 않는다. 이는 제우스가 부친을 살해한 이후 이루어졌던 ‘토템적 상징화’ 이전의 시대로 돌아갔음을 뜻한다. 아버지의 욕망에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듯이 오늘날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이것을 전도시키는 것은 ‘앎’이 아니라 어떤 ‘욕망’이다.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어떤 욕망, ‘사탕’을 얻기 위해 ‘심부름’을 하는 아이나 ‘돈’을 받기 위해 학교에 가는 어떤 학생들처럼 자본의 욕망은 자본가만이 가진 욕망이 아니다. ‘자기 가치를 증식하고자 하는’, ‘부’를 향한 자본의 욕망은 그들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 없이 실현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은 우리에게 달콤한 속삭임을 건넨다. ‘너도 성실하게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고 그 부로 향락을 누릴 수 있다’고.
근대의 ‘생산 패러다임’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에 내재화된 삶의 양식으로, 근대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가치 인식적 메커니즘이 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외설적 아버지’는 그 스스로 이런 ‘근면-성실-책임’의 메커니즘을 파괴해버렸다. 더 이상 ‘부’가 그 스스로 가치를 생산해서 얻은 ‘부’가 아니듯이 ‘빈곤’도 더 이상 그가 게으르고 나태하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부자 되세요’라는 달콤한 속삭임만으로 사람들을 꾀어낼 수 없다. 아버지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전치하는 아이처럼 국가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전치시키며 근대적 산업화의 기수로 자신을 주체화하고 가난했던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새마을운동을 간직하고 있는 세대들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퇴행적인, ‘근면-성실’의 ‘생산 패러다임’이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가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 ‘생산’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동어반복적인, 이 정의에서 가치와 생산은 연결되어 있으며 이 연결을 완성하는 것은 ‘노동’이다. 우리네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가치’있는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노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말들을 우리는 듣게 될 것이다.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먹고 살 수 있는 물질적 토대 자체를 생산하는, 이 사회의 주역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명박 정권의 ‘국민 여러분, 부자 되세요’처럼 달콤한 악마적 속삭임에 불과하다. 박정희도 ‘산업의 역군’으로 ‘근로자’를 상징화했다. 심지어 박정희는 가난과 궁핍의 수난을 겪어온 민족의 한을 넘어설 수 있는 주체로, 민족중흥의 역사적 주체로 노동자들을 상징화했다. 따라서 박정희의 근대화는 상징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의 독점체인 국가가 ‘노동의 배제’가 아니라 ‘노동의 찬양’에 기초한 ‘근면-성실한 신체’, 곧 ‘생산적 국민이라는 종복(subject, 주체)’을 생산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아침 6시면 ‘잘 살아보세’란 노래가 동네 전체에 울려 퍼졌고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빗자루를 들고 모여들어 골목길을 쓸었다. 노동은 신성했다.
그러나 박정희에게 신성한 노동은 그것이 자본을 증식하는 한에서였다. 따라서 항상 파이의 크기를 키워서 모두 다 잘 사는 길을 모색하자며 정작 커진 파이를 가져간 것은 ‘재벌’ 또는 소수의 ‘지배자들’이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배제된 것은 신성한 ‘노동의 가치’가 아니다. 배제된 것은 오히려 노동이 생산한 부를 특정한 세력이 독점적으로 전유하면서 그 부를 그들만의 향락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박정희의 개발독재식 파시즘에 대항했던 운동들은 그 부에 대한 ‘전 인민적 향유’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정당한 몫과 권리를 주장하는 근대적 노동권 확보를 위한 투쟁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물론 당시의 임노동이 강력한 파쇼권력에 의해 주도된 자본의 힘에 밀려, 등가교환을 할 수 없었고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조차 없는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까지 한국의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투쟁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이것은 점차 퇴행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이제 자본주의는 ‘노동’ 그 자체를 배제하며 자신들이 소유한 거대한 부를 기반으로 소비-향락의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동자는 성공한 사람들의 특권이며 대다수는 실업에서 비정규직까지 다양하게 분포한다. 더욱이 오늘날 자본이 야기하는 문제 또한 복합적이며 다양화되었다. 그러나 ‘생산의 패러다임’은 노동자만을 이 사회의 생산적인 주체로 특권화하며 자본주의적인 노동운동, 즉 자본-임노동의 교환에서 노동력의 가치를 올리는 것에만 주력하는 노동조합주의 형태로 노동운동을 가둔다.
이런 점에서 이번 진보평론의 특집은 ‘노동 중심의 생산 패러다임 넘어서기’로 구성하였다. 이번 특집은 4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기획에는 청년층의 노동에 관한 꼭지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빠졌다. 기획 에서 청년층의 노동에 대한 인식을 주요하게 본 이유는 최근 청년세대의 취업난과 구직경쟁을 보면 자본이 어떻게 노동을 주변화 하면서 자신의 규율체계 속으로 다시 포섭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구직경쟁을 벌이는 청년세대 내부에서도 경쟁을 통해 멋진 삶을 즐기고 싶다는 욕망과 더불어 노동에 대한 혐오가 동시에 존재한다. 노동에 대한 혐오는 사회가 이미 계급적으로 분열된 사회이며 동시에 ‘노동하는 자’의 소외된 자기부정을 명백히 보여주는 징표임에도, 청년세대가 갖고 있는 경쟁을 통해 성공한 삶에 대한 판타지(허구적 욕망)가 ‘노동하는 자’로서의 소외된 자기부정(=노동에 대한 혐오)을 정당화하고 있다. 삶의 허구적 욕망에 기초한 이러한 자기 정당화는 만연한 실업상태와 그것이 강요하는 가혹한 구직경쟁에도 청년세대가 사회적 주체로 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주된 이데올로기적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청년세대의 사회적 주체화란 측면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뤄 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번에 실린 각각의 글들 사이에는 일정한 이견이 있음에도 ‘노동 중심의 생산 패러다임’을 넘어서고자 하는 공통점이 있다.
박영균은 “맑스의 국민경제학 비판과 현대자본주의체제 분석”이라는 글을 통해서 기존에 읽었던 맑스가 아니라 그 속에서 억압되어 왔던 맑스를 〈경제학-철학수고〉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그리고 아담 스미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에 대한 맑스의 노트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조정환은 “신용과 노동: 화폐적 시초축적으로서의 부채체제와 노동의 이중화”에서 맑스의 시초축적론과 관련하여 국가신용의 문제를 다루면서 국가폭력이 신용을 창출하면서 “사회적 권리를 사회적 부채로 전환시키고, 또 사회적 부채를 사적 부채로 전환”시켰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김도현은 “정립에서 자립으로, 자립에서 다시 연립으로”에서 장애인이란 호명은 근대적 노동개념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한국의 장애인대중운동이 추구하고 있는 ‘자립’은 신체-노동활동-일상활동이란 맥락 속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개인주의의 틀 안에 있다고 본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제시하는 기회의 평등과 시장주의적 대안과 자활적 노동정책에 동요하고 있기에, 대안으로 노동을 연립적 시민권으로 재구성하자고 실험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조건준은 “노동을 지배하는 배신의 프레임들”에서 희망은 빠지고 위기만 남아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공포와 위기의 틀에서 벗어난 ‘자존감’과 ‘희망’에 기초한 노동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특히, 그는 현장운동의 풍부한 경험을 통해서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이 내적으로 성찰해야 할 지점들을 생생한 체험적 언어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필자들의 제안은 제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생산의 패러다임’ 또는 ‘노동의 과잉상징화’에 기초한 현재의 노동운동을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생산의 패러다임은 암묵적으로 자본주의적으로 규정되는 ‘생산’의 의미체계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사회적인 지배담론을 만들어내는 통념의 틀이 되고 있다. 여기서 노동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노동의 과잉상징화’와 ‘생산의 패러다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번 기획은 ‘생산’과 ‘노동’이라는 생산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우리의 대안 세계적 상상력을 ‘부채’와 ‘장애인’에 대한 영역으로 넓힘과 동시에 이를 통해서 노동운동 그 자체를 대상화하고 반성과 성찰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자본을 넘어선 대안 세계적 전망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제출되기는 했지만 박영균은 “향유하는 사회”라는 맑스의 전망을 통해서 “자본 없이 살기”에 기초한 “생산-소비의 코뮌”을, 조정환은 “보편적 채무관계를 특이성들의 보편적 공통되기로, 보편적 상호부조로 만드는 것”을, 김도현은 “자립/의존이라는 이분법” 대신에 “‘함께 어울려 섬’, 즉 연립”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호 시평에 실린 김수행의 “미국 대선과 한국 대선을 비교하면”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선 국면에서 화두로 떠오른 경제민주화가 궁극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노동하는 개인들의 연합’(자개연)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현재의 다양한 논의들의 대안적 전망은 이와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정세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불분명하다. 이번 대선에서 노동자 후보가 둘이라는 점도 이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갈 길은 더욱 험난하고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며칠 앞으로 다가온 대선은 현 시기의 정세를 규정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변수라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이번 진보평론에는 많은 선거 관련 글들이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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