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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 53호(2012년 가을)발간(특집: 진보정당운동에 길을 묻�
Name  진보평론
Date  2012년 0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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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진보정당운동에 길을 묻다

 

오늘날 한국에서 진보적인 대의정치를 대표하는 것은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이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탈당파, 국민참여당이 통합한 통합진보당은 13%를 득표하면서 13석을 얻어냈다. 그러나 총선 이후, 통합진보당 안에서 제기된 총체적인 부정, 부실한 당내 선거와 이후 전개된 당권파 대 비당권파의 대립은 통합진보당의 파산뿐만 아니라 진보정치 전체에 대한 대중적 환멸의 확산과 함께 한국진보정당운동 자체의 공멸이라는 위기를 가져왔다. 이에 "진보평론"은 진보신당(김종철),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공동실천위원회(박성인), 사회진보연대(이현대), 새로운 노동정치를 위한 제안자모임(정종권)에서 활동하는 4인과 진보적 지식인 1(이창언)에게 작금의 현안과 관련된 12개의 질문을 주고 이를 중심으로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에 길을 묻다라는 특집을 구성하였다.

이번 특집 글은 지난 총선 평가와 함께 이후 대선 전망까지를 포함하여 한국진보정당과 진보정치에 대한 견해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글들 속에서 한국의 진보정당 또는 진보정치운동의 현재와 그들 사이에 부재하는 소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지난 총선과 현재의 국면에서 가장 큰 문제로 노동정치의 실종을 지적하면서 독자적인 노동정치로서 진보정치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하는 노동정치와 이에 따른 전략의 상은 서로 매우 다르다. 이들을 관통하는 코드는 선거’, ‘의회’, ‘정당이며 이들 사이의 관계를 갈라놓는 구획선은 오늘날의 지평에서 볼 때, 제도의 이다.

제도 은 지금의 선거-의회 공간 속에서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제도 안의 정당을 만들고자 하며 국가를 이용하여 노동의 정치를 만들고자 한다.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 진보신당 등은 이를 대표하며 의회-선거 공간에서의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대중을 대의제적 정치의 주체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 11표로 재현되는 대의제적인 정치가 가지고 있는 국가 안으로의 포획과 체제내화를 비판하면서 이들의 집권전략을 의회주의라고 하며 현장과 투쟁, 대중 자신의 주체화 전략을 추구한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개의 극이 현실 정치에서는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일 이 두 개의 극이 현실정치에서 작동한다면 문제는 간단할 수 있다. 그러나 좌파정치는 이 둘의 한 극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이 두 개의 극 사이에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 두 개의 극 중 어느 한쪽만을 주장하는 운동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좌파정치는 의회-제도를 완전히 부정하고 그 밖에 존재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의회-제도가 가지고 있는 포획과 체제내화의 경향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번 특집 글에서 어느 한쪽을 끊임없이 밀쳐내려고 하는 어떤 경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서로를 부정하면서 끊임없이 상대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부정적 몸짓과 목소리로 침몰하는 배를 구할 수 없다. 배에 타고 있는 구성원들의 차이가 있지만 한 곳을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공통의 정치적 의지를 가진 실천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정치가 필요하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공통의 프레임을 창출하고 집합적 권력의지를 생산하면서 반자본의 대중적 열망을 새로운 미래 창출의 희망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진보운동은 여전히 부정적 몸짓과 비판, 낡은 정치적 폭로에 머물고 있다.

이로 인해 공통의 프레임을 생산하는 것을, 자기 긍정적인 내용의 생산과 희망의 창출을 가로막게 된다. 한국좌파의, 정파운동의 폐해는 이것이다. 여러 필자가 주장하듯이 정파는 있을 수 있으며 정파가 살아있을 때 정치운동은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정파가 자신의 정치적 전망과 내용의 생산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다른 정파들에 대한 부정적 몸짓으로 자신들을 묶는 것이 되어버릴 때, 정치운동은 낡은 것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이 보여주는 부정적 몸짓의 과잉과 긍정적 내용의 빈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비판은 예리하면서도 단호하다. 하지만 좌파진보진영이 제기해야 할 새로운 통일의 패러다임이나 좌파진보운동 전체가 바꾸어야 할 문화’, ‘새로운 프레임의 내용’, ‘진보좌파운동의 단기적·중장기적 과제, 정작 일보 전진을 위해 공통적으로 생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명료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이는 몇몇 사람의 탓은 아닐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이 강령이나 정책 프로그램, 정치적 로드맵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다.

누가 어떤 정책이나 강령 내용들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그것을 비판할 뿐, 그것들을 연결해가면서 공통의 내용을 생산하는 소통으로 바꾸지 않는다. 따라서 이창언은 새로운 진보좌파정당 건설을 위한 토론 시안을 제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진보의 재구성 또는 새로운 진보좌파진보정당 건설에 앞서 위기론의 타자화극복과 위기의 복합성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즉 진보적 성찰성에 기초한 혁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통진당의 오류, 한계를 반면교사로 삼되, 그들만의 문제로 환원시키지 말아야 하며 진보좌파의 실패에 대한 엄밀한 평가와 반성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그것은 도덕성 회복 등 내부 혁신과 통합적 리더십 구축과 같은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보좌파적 가치와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좌파운동의 공통성을 생산할 수 있는 소통이 필요하다. 또한 인식의 전환태도의 전환이 있어야하고 상대에 대한 부정적 몸짓과 비판의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판의 예리한 칼날을 자신에게로 돌려야 하며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고 성찰해야 한다. 이것은 현재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의 난맥상이 그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좌파 전체의 책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정치의 위기는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전개된 운동의 내재적 위기, 즉 권위주의 시기 운동의 한 주기를 끝내고, 민주화 이후에 나타나는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히 새로운 사회운동의 주기(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과 신세대 논쟁, 소비문화의 확산, 신자유주의적 프레임이 전면적으로 수용된,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민주정부에 대한 실망과 회의로 나타났으며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담론, 민주주의운동에 대한 회의와 도전이 나타나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심화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은 대화와 토론, 논쟁을 가장한 자기 안에서의 대화’, ‘독백을 벗어나야 한다.

바로 이런 자기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성찰에 기초한 태도의 변환은 자기가 가진 한계에 기초하여 다른 정치집단과 함께 정치적 겜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본질적으로 좌파정치는 대중의 변혁적 열망을 집단적 정치권력의 힘으로 바꾸어가면서 자본-임노동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것은 끊임없이 다른 정치집단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서 미래사회의 공통성을 창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노동의 정치를 말하고 노동자계급운동을 말한다고 그것이 정말로 노동자계급의 정치, ‘노동의 정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좌파정치운동단체들이 이야기하는 노동의 정치는 좌파의 정치라고 할 수 없다.

1980년대 좌파운동보다 오늘날 좌파운동이 가지고 있는 퇴행성은, 과거의 운동이 오히려 노동자와 노동자계급을 구분하고 사회민주주의적 정치를 고수하고자 했다는 점에 있다. 노동자는 자기 모순적이며 정신분열증자이다. 한편으로 자본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임노동자이면서도 자본이 임노동을 상품으로 구매할 때 배제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가진 자라는 점에 있다. 여기서 노동은 자본이 임노동이라는 상품으로 포획할 때 배제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외부이자 자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모순 속에 좌파의 정치의 고유성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은 노동의 정치를 말하면서 실상은 노동조합의 정치라는 임노동자의 정치를 수행하고 있다.

이번 특집 글에서 보듯이 필자들은 민주노총을 질책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본래가 임노동자의 생존권과 이익을 위해 싸우는 조합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특정한 정당을 지지하고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정당정치를 이용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민주노총은 정치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임노동의 교환시스템이 만들어낸 조직일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민주노총이 아니라 바로 좌파정치를 수행하고 있는 좌파정치운동, 좌파정당운동에 있다. 그렇다면 좌파정당운동이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임노동자를 노동자로 바꾸면서 변혁의 정치적 주체로 만들어내야 하는 자신들의 정치행위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게다가 오늘날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지배 시스템은 산업자본주의 시절의 노동과 자본처럼 명료한 적대의 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지금의 세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보여주고 있는, ‘불안정성위기는 자본의 주기적 위기를 넘어서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자본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책략들을 구사하고 있다. 자본의 책략들은 점점 다가오는 임박한 파국의 징조들이 유발하는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자기이해와 총자본의 공통이해사이를 반복하며 필사적으로 살아있는 노동 전체에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지젝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역설이 진짜 우리가 처한 곤란이라는 것을. 그러나 한국에서의 노동정치, 진보정치는 이 곤란을 사유하지 않으며 적에 대한 폭로분노를 노동 자신의 자기 연민으로, 투쟁에 대한 헌신성을 정치적 올바름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그러나 100년 전에 이미 레닌은 소위 노동자의 정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선언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떠올리기를 두려워하는 명제, ‘외부로부터의 도입이라는 테제에서 외부는 지식인도, 엘리트도 아니다. 거기에서 그가 가장 힘주어 말했던 것은 노동조합으로부터 사회민주주의 정치자생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표상하는 정치는 임노동의 정치이다. 그것은 임노동이 자본에 자신을 팔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힘의 불균형과 생존권의 위협, 그리고 자본에 대항하여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정치이다. 노동법과 복지를 둘러싼 정치가 비록 국가권력이나 법제정과 같은 부르주아 정치의 차원으로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노동의 정치는 아니다. 이는 자본과의 이해관계에 갇혀 있는 노동조합의 정치일 뿐이다. 반면 사회민주주의 정치는 임노동을 표상하는 정치가 아니라 임노동 그 자체를 파괴함으로써 자본을 파괴하고자 하는 정치이다. 따라서 그것이 표상하는 노동자는 자본에 의해 고통 받는 자로서의 노동자가 아니라 자기를 벗어나 노동이라는 인류 전체를 표상하면서, 자본에 묶여 있는 임노동자인 자신을 부정하고 해방의 정치를 수행하는 노동자이다.

물론 이것은 노동조합이 아무런 존재 가치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본적인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가치와 의미는 노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자기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만 그것이 생산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이 수행하는 정치와 좌파정치운동이 수행하는 정치는 질적으로 다르며 각자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할 때에만 노동조합의 정치가 마치 해방의 정치인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은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생산하는 주체 생산의 형식일 뿐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는 내용을 생산하는 조직 형식이다. 반면 은 조합원의 이익이 아니라 그것을 벗어나 때로는 자신에게 당장 손해가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싸우며 모든 피억압 인민의 투쟁을 연결시키고 집합적인 권력의 힘을 만들어내기 위한 투쟁의 내용을 생산하는 조직 형식이다. 따라서 레닌의 의미에서 은 거기에서 수행하는 일상적인 활동 전체를 해방의 정치, ‘사회민주주의 정치로 바꾸어 놓는, 정치적 주체형성의 조직형식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런 강제적인 조직형식을 사유했던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자본-임노동의 교환체계와 상품물신성이라는 재현형식)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 안에는 이미 대의제라는 자본주의적 재현체제와 상품형식이 체화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목숨을 건 도약처럼 자신과의 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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